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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입은 하얀천사들-56-사회생활 첫 발/2006.12.20
<511>사회생활 첫 발

월급 많은 곳이라고 보내준 곳이 한일병원 간호과장 자리였다. 제로에서 출발한 군 간호장교 경력자에게 민간병원 간호사 일은 호강이었다. 좋은 시설, 좋은 환경에서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일과는 콧노래를 불러가면서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월급 액수에 놀랐다. 군에서 받던 봉급의 서너 배는 됐다. 보너스가 연 600%였다. 말로만 듣던 보너스를 한 달 걸러 한 번씩 받고 보니, 그동안 군에서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된 것이 큰 기쁨이었다. 험한 군대생활 하는 맏딸 일로 늘 마음 아파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싶었다. 고향의 집과 전답을 처분해 용산구 보광동에 아담한 집도 한 채 마련하고 보니, 비로서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군에서 내 뜻과 달리 밀려나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하던 친구 황영희도 좋아했다. 나를 부려먹기만 하고 보상을 해 주지 못 했다고 마음의 빚으로 삼고 있던 그였다.

2군사령부에서 같이 일하던 간호장교 출신이 있는 병원이라고 군 출신들이 많이 찾아왔다. 특히 정변 주체 세력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한일병원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게 됐다. 일에 지치면 언제라도 와서 가볍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뒤로는, 더욱 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3년쯤 흘렀다. 좀 심심한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다른 자리가 나타났다. 해외개발공사 정희섭 사장에게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독일에 간호원을 파견하는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초년장교 시절부터 존경하던 분에게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나라의 사업을 돕는다는 명분에 오래 잊고 지내던 충성심이 자극됐다.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었던 세월이 부끄럽기도 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사령장에 따르면 처음 몸을 담은 곳은 해외개발공사 산하 인력연구소 신체검사부였다. 1966년 4월 1일 3급 사무원으로 입사해 수간호원 보직을 받았다. 인력연구소란 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독일에 보내는 간호원을 모집하고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그 시절 독일에 간호원과 광부를 보내는 일은 한국 사회에 큰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가 조금 넘었다.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고, 학교에는 도시락을 싸 오지 못 해 운동장 한 구석에서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는 아이가 많았다.

그런 시대에 독일에 갈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여간 행운이 아니었다.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몰려 들었다. 간호원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정치인들이 “나를 찍어주면 서독에 간호원으로 보내주겠다”고 표를 구걸한 시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독에 가면 월급이 한국의 7~8배라 했다.

서독에 처음 인력을 보낸 것은 63년 광부가 시작이었다. 간호원은 민간 베이스로 64년에 128명이 파견된 것이 처음이었는데, 한국 간호원들이 일을 잘 한다는 평판이 났다. 서독 정부가 공식 요청을 하게 되어, 66년부터는 정부 베이스로 보내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간호원 파견은 76년까지 계속되어 연인원 1만1000명을 넘겼다. 지난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파독 간호원 40주년 행사가 열렸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인공들의 행사가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한 것을 나는 애석하게 생각한다.

<조귀례 예비역 중령 정리=문창재(언론인)> /국방일보

손경선 , 2006-12-20 , 조회 3443 , 추천 0 , 반대 0 , 파일수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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