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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입은 하얀 천사들<55>군복을 벗다/2006.12.19
군복입은 하얀 천사들<55>군복을 벗다

이제 군대 시절 얘기를 마무리 할 때가 돼 온다. 13년이라는 세월은 인생 80년 전체로 보면 길지 않은 세월일지 모른다. 그러나 젊은 날 고난과 긴장의 연속으로 점철된 세월이 10년이 넘는다는 것은 결코 짧지 않다. 군문을 떠난 뒤로도 나는 간호장교 출신이라는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13년은 더욱 길고 의미심장한 세월이었다.

2군사령부에서 1군사령부로 옮겨 1개월 남짓 지나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그 뉴스를 듣고 몹시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그때 ‘안 가도 좋다’고 말한 것이구나. 그때 비로소 박정희 장군에게 신고하러 갔을 때 그가 한 말 뜻을 짐작하게 됐다.

4·19 이후 5·16까지의 1년 남짓한 세월은 데모의 시대였다. 그 시절을 겪은 한국인에게는 공통된 기억일 것이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정부가 무리하게 틀어 막으려 한 것이 발단이 돼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욕구는 활화산처럼 터져 넘쳤다. 그것이 4·19 학생혁명으로 결실을 맺자 전국의 도시들은 연일 데모 행렬로 메워졌다.

넝마주이 데모, 식모 데모, 국민학생 데모로 상징됐던 시위 만능 풍조는 한국 사회를 한순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로 인해 서민들의 생업에 지장이 생기고, 국가 경제가 어려워져 국민의 염증이 비등점에 이르렀을 때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군에서는 한동안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특히 1군에서는 앤티 박정희 여론도 있었다. 2군에서 주도한 일이라는 데서 오는 경쟁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기갑사단을 앞세우고 서울로 밀고 올라가자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나는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박정희 장군은 동상감’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어지러운 세상을 누군가 틀어쥐고 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대로 무형의 반발은 점차 누그러 들었다. 정변이 성공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아쉬웠다. 2군에서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살이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5·16 이후 나는 더 이상 군에 몸 담을 수가 없게 됐다. 1961년 7월 30일 나는 13년 동안 온갖 애환에 절어 빠진 육군 간호장교 옷을 벗었다.

전역하고 나서는 한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한꺼번에 다 해볼 양으로 미국도 가고, 일본도 가보았다. 보고 싶은 친구·친지들을 만나 실컷 수다도 떨어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갈곳이 없다는 것,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 큰 외로움이었다. 가슴 한가운데 휑뎅그렁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서 정변 주체 김재춘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엇 하고 지내느냐, 한 번 사무실로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2군 간호과장 시절 그는 5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다. 광주에 출장을 갈 때마다 귀찮게 했던 사람이다. 간호장교 숙소에 샤워시설까지 해 내라는 요구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아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다.

“뭘 하고 싶소? 언제까지고 놀 수만은 없지 않소.”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말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직에 있었던 그가 해 주겠다면 못 할 일도 없었다. 나는 무작정 ‘월급 많이 주는 자리’에 보내달라고 했다.

<조귀례 예비역 중령 정리= 문창재(언론인)> / 국방일보

손경선 , 2006-12-20 , 조회 3179 , 추천 0 , 반대 0 , 파일수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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