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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을 캐며

 숨이 차 헐떡거리며 약속된 산장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전 중에 있었던 부부 동반 체육대회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부부는 부활절 미사를 마치고 곧장 별장으로 달려온 것이 너무 일찍 도착했나 보다. 체육대회 장소를 찾아 내려가는 도중, 개울가 언덕빼기에서 뾰족이 고개를 내민 토실토실한 쑥들이 손짓 했다.
 반쯤 꽃봉오리를 피워낸 철쭉과 어우러져 방실거리는 쑥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나도 모르게 성큼 다가갔다.담을 바구니도 없고 칼도 없이 손으로 쑥을 뽑아 손톱으로 뿌리를 자르고 다듬어 손가방에 담았다..쑥 향으로 정화된 맑은 바람 한줄기가 볼을 스쳤다. 도시의 빌딩숲과 공해 속에서 삶에 시달리는 이웃들을 모두 불러내고 싶은 날이다.
 봄의 전령인 쑥은 만병통치약이라 불리우고 건강식으로 곧잘 등장한다. 참쑥, 물쑥, 약쑥 등 약으로 쓰이거나 장수식으로 육체를 지켜주는 이른 봄의 약초이다.
 황폐되어가는 정신 세계도 쑥 향으로 정화되었으면 싶었다. 살 갖을 간지르는 듯한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쑥의 무리 속에서 어느 여인의 영상이 살며시 떠올랐다.
 그녀는 남편의 도박으로 15년동안 시달려온 삶을 접고 싶어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도박 병으로 자신이 황폐되고 가정이 파탄되는 아픔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 아픔을 함께하며 고뇌해 왔던 어두운 마음에 봄의 새순은 한 가닥 희망을 암시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 자욱한 도박판에서 밤새껏 쭈그리고 앉아 병을 얻기보다 약동하는 들판을 찾아 새 생명의 신비를 느껴보면 어떨까? 자연을 자주 접하다 보면 고스톱이 재미있어 빠져 들듯이 자연의 향기에는 더 깊이 매료될 것이다. 손톱 밑이 까맣게 된 것도 투정하지 않고 쑥을 캐며 그 여인의 고뇌를 내 것처럼 받아 들이고 있었다.
 내려가자고 조르던 남편은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나 보다. 어쩌면 쑥을 캐는 아내의 모습에서 신혼의 추억이 되살아 났을지도 모른다. 쾌청한 공기를 한아름 안을 듯 두 팔을 벌리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남편의 노래는 마음껏 쑥을 캐도 좋다는 은근한 정담을 싣고 메아리되어 들려 왔다.
 맨손으로 쑥을 캐는 아내의 손이 안쓰러웠는지 뾰족한 돌칼을 만들어 주었다. 손으로 뜯는 것보다 불편해서 뒤로 밀쳐 두었지만 돌칼에 묻어온 남편의 푸근한 정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30년 전 이맘때. 남편이 강원도에서 11사단 의무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신혼 시절이었다. 첫 아들은 곧 첫돌이 돌아오는 손자만 했다. 남편이 출근한 적막한 산골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거나 아이를 업고 쑥을 캐러 가곤 했었다.
 씨앗을 뿌려 심어 놓은 듯한 쑥밭이 집 뒤 가까이 있었다. 포대기를 풀밭에 깔아 놓고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고는 쑥 캐기에 바빴다. 며칠씩 뜯어 모은 쑥이 너무 많아 햇볕에 말려 상자 가득히 넣어 부산에 계시는 시어머님께 보내 드리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있는 외로움을 쑥에 실어 보내단 날, 심연을 넘나들던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앞이 흐렸고 그 날밤은 고향으로 달려가는 꿈을 꾸곤 했었다.
 왁자지껄한 회원들의 올라오는 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내심으로는 좀더 늦게 왔으면 싶었다. 쑥을 캐는 재미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쑥의 속성을 캐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봄에 쑥 향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언 땅 속에서 한 겨울을 견디어 냈던 쑥이다. 그 새순을 보면서 뇌리를 맴도는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정신적으로 병든 방황하는 가정에 봄의 새순처럼 생기있고 활기찬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쑥 뜸이나 쑥 찜이 약이 되듯, 정신병인 도박도 동병상련(同病想憐)의 단도박(斷賭博)모임을 통해 치유되고 정상적 가정생활이 되길 갈망해 본다. 만물이 소생하는 들판을 그들에게 안겨주고 싶다.
 빨리 별장으로 올라 가자는 회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목을 잡는 쑥을 뒤로 했다. 식사 후 언제나 그랬듯이 화투 판이 벌어지면 다시 쑥을 캐러 나오겠다는 마음 다짐을 했다.
 그 날의 모임은 의외였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화투 판 대신 노래방, 품바타령, 사물놀이는 흥겨워 별장이 떠나갈 듯 했고 전회원이 한데 어우러져 고조된 분위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도박 추방 운동까지 펼치고 있는 나의 고뇌를 알고 있는 회장님이 평소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회원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는 것은 뒤 얘기다.
 상습도박자들도 처음에는 심심풀이, 스트레스 해소, 사교 목적, 소외되기 싫어서 우연히 고스톱을 하게 된 것이 절제력을 잃고 말았다는 고백을 했다. 고스톱 화투 놀이가 도박의 대표적이고 첫 단계라고 한다. 담배 연기 자욱한 폐쇠된 방안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그들에게 이 봄 들판을 보여주고 싶다. 싱싱한 생명력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三人行必有我師焉이란 논어의 교훈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인간의 궁중 심리는 리더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 십상이다. 향락과 퇴폐 분위기로 끌고 가는 선두자가 있는가 하면 모이기만 하면 고스톱 판을 펼치는 고정 팀이 있다. 위트와 유머를 지닌 좋은 벗이 있는 모임은 마냥 즐겁고 뒤 맛도 개운하다.
 그랬다. 그날의 모임은 봄이 우리에게 준 향기로운 선물이었다. 죽었던 땅 얼었던 땅에서 만물이 소생할 때, 봄 기운에 실려 진한 쑥 향기를 서로에게 풍겨서 안온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회원들은 모두 떠나고 내려오는 길에 또다시 쑥을 캐러 언덕빼기로 갔다. 석양이 불 그레 물들 때까지 뜯은 쑥은 쑥털털이나 쑥 국으로 식구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기에 충분했다. 간간히 불어 오는 봄 바람을 타고 온 몸을 휘감는 쑥 향이 정겹다.
 연기 자욱한 어둡고 병든 곳, 고통 받고 슬픔에 지친 사람들이 있는 그 모든 곳에 쑥 향으로 가득 찼으면.......

 

                                           1994. 5 (수필문학)   

 

성주향 , 2005-01-21 , 조회 1832 , 추천 0 , 반대 0 , 파일수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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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Date 2005-01-21 13:59:29   IP *.242.*.119 +0 -0
벌써 봄이 오는 듯한 착각에 빠져 글을 읽어 내려갔는데 1994년도 이야기군요. 저는 20기 김현숙마리아입니다. 우리홈의 동문칼럼에 성주향 동문 추가했다해서 우연히 들어와 여기저기 살피고 다녔어요. 곳곳에서 활동하시는 선배님들의 숨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오네요. 기껏해야 우리 TNT방에만 열심히 드나들었는데 이곳에도 자주 와야겠어요. 저는 내일 2박3일간 부산 명상의 집으로 피정간답니다. 다녀와서 오려주신 글 읽고 인사드릴께요. 감사하고 수고 많으십니다!
Date 2005-01-27 11:44:58   +0 -0
이제 봄이되면 진료소 앞마당가득 쑥이 나겠지요? 혼자도 실컨 뜯어먹고남아 어디 먼데까지 갈것도없는 쑥. 올핸 쑥을 캘때마다 선배님 얼굴이 어른거릴것같습니다.^^
Date 2005-01-28 14:08:39   +0 -0
은은한 쑥향기와같이 정신의 향기보약으로 써셔도 좋으실 우리 선배님 선배님의 향기가 은은히 퍼져와요 문필의 아름다움도감성도 너무 고와요.감동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