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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가 익어갈 무렵

 바다와 계곡은 피서객들로 붐비고 있다. 남편은 친한 친구끼리  지리산 계곡으로 피서를 떠난지 3일째다.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자연의 품에 안긴 남편의 건강을 기원해 본다.
 하던 일을 잠시 접고 휴식한다는 것은 내일의 활기찬 삶을 위한 재충전이고 활력소이다. 이 여름, 피서지에다 무기력한 삶을 묻고 매운 고추맛 처럼 당차고 야무진 삶을 캐내고 싶다.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달리기 잘 하던 나는 언제 부턴가 무리한 운동을 두려워한다. 아이들 성화에 못이겨 곧잘 가던 바다도 이순을 눈 앞에 둔  지금은 얼굴의 기미가 염려스러워 그늘만 찾는다.
 안방은 나의 가장 편안한 피서지이다. 바깥은 숨이 막힐듯 덥지만 섭씨 25도를 유지하는 안방은 조용하고 시원해서 지상낙원 바로 그것이다. 꽃과 난향이 가득하고 알곡처럼 쌓인 책들로 마음이 풍성하다.
 커피 한 잔으로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공지영 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으며 세 여성의 삶을 짚어 본다. 혜완, 경혜, 영선, 이 시대를 살아 가는 다른 여성들 이야기. 한 여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 간다는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작가는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수 없이 많은 가시덤불과 수렁들을 노기찬 얼굴로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은은하게 흐르는 피서지의 배경음악에 취해 명상에 잠겨 본다. 되돌아 볼 경황도 없이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가쁘게 바쁜 일정을 떠난 안방 피서지의 하루가 더없이 편안하고 풍요롭다.
 불현듯 풋고추 생각이 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플라스틱 상자에 십여포기 심어 둔 고추 밭에는 고추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려있다. 알맞은 크기의 고추를 한 줌 따냈다.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필요한 사람을 뽑아내듯.......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한다.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소홀히 말라는 뜻이다.
체격이 왜소한 친구가 있다. 그 녀가 하는 일은 야무지고 당차다. 이 단체 저 단체에서 그녀를 필요로 한다. 고추를 골라 따내듯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입맛이 없을 때 고추는 식욕을 돋군다 .따뜻한 밥보다 찬물에 밥을 말아 누런 된장에 쿡 찍어 먹는 것은 별미다. 얼큰 달착지근한 고추를 먹고 보니 꼭지가 수북이 쌓였다. 잘 어우러진 피서지 덕분이다.
 나는 유달리 고추를 좋아한다. 풋내나거나 톡 쏘듯이 너무 매운 것보다 맵싸하면서도 달큰한 고추가 일품이다. 고추만 보면 군침이 돈다. 포장마차나 시장터를 지나다 고추 부침개를 보면 곧잘 남편의 손을 끌고 들어가곤 한다.
여름철에는 부추와 고추를 섞은 부침개가 자주 밥상에 오른다. 때로는 너무 매워서 입안이 얼얼하고 속이 화끈거려 다시는 먹지 않으리라 맹세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식욕은 발동한다. 위장이 불편하면 먹을 수 없을텐데 체질이 맞긴 맞나보다.
 고추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사람들은 먹어 본 음식을 더 즐겨 찾는다. 피난시절에 많이 먹었던 것이 고추의 진미를 알게 된 동기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25사변을 당해서 피난길에 올랐다.낙동강 전투지 옆의 살던 집을 버리고 어머니를 따라 정처없이 길을 걸었다. 길가에는 못다 팔고 버리고 간 수박과 참외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 여기 저기 고추 밭에는 싱싱한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손길을 기다리는 듯 했다.
 걷다가 배고프면 아무 고추 밭에서나 고추를 따다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이 유일한 반찬이었다.
삼랑진의 어느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는 고추맛이 더 진했다. 한달간의 수용소 생활이 고생스럽긴 했지만 시대가 준 불행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풋고추가 익어갈 무렵 고향으로 돌아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살던 집은 불타버렸고 곡식 가마는 반쯤 타다 불이 꺼졌는지 볶아 놓은 보리쌀 같았다.
피난을 잘 하고 돌아온 희영이 엄마는 고추 따러 고추 밭에 갔다가 지뢰를 밟아 다시 못 올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뜰안에 몇 포기 심어 둔 고추 밭에서 불긋불긋한 고추를 따오셨다. 크고 싱싱한 붉은 고추는 보기만 해도 매울 것 같아 겁이 났다. 먹지 않겠다고 도라질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들큰하다고 하셨다. 그때 용감하게 먹어 본 것이 붉은 고추의 진미를 알게 된 동기다.
친구들과 식사할 때 고추가 나오면 내 앞에 밀어 준다. 가끔 아들네로 다니러 가면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식성을 알았다는 듯 고추 부침개가 필수적으로 상에 오른다.
고추는 건강식품이다.고추 속에 캡사이신이란 성분이 있어 김치가 쉽게 시는 것을 막는다. 고추 가루를 소주에 타서 마심으로써 감기를 떼는 묘약이기도 하다.
광해군 때 기록을 보면 당시 고추는 약포(藥鋪)의 뒤란에 조금씩 심었던 약용 작물이 었다. 고춧가루는 우리 조상들이 추운 겨울날 먼 길 떠날 때,버선틈에 넣어 발을 덥혔던 방한제로 쓰여졌다.
미국의 저명한 요리사이며 저자인 마크 밀러는 한국 고추는 적당히 맵고 달콤해서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고추로 추천했다.
맵싸하고 들큰한 한국의 고추 맛 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치가 시어지는 것을 막는 캡사이신의 작용, 방한제와 질병의 묘약이 되는 그러한 삶이고 싶다.
뙤약볕 아래서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짜증스런 피서보다, 집안에서 하고 싶은 못다한 일들을 하나씩 해 가며 즐기는 것이 나의 신바람 나는 피서이다. 안방 피서지에서 고추를 통한 생의 또 다른 의미를 건져 올려본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옥상의 풋고추는 붉은 옷을 갈아 입고 잘 익어갈 것이다.
나의 삶도 따가운 햇살에 잘 익은 붉은 고추처럼 성숙된 삶으로 영걸어 가기를 바란다.
                                  

                                          1996. 9. 수필문학

성주향 , 2005-02-02 , 조회 1657 , 추천 0 , 반대 0 , 파일수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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